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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019년 초부터 난 굉장히 불안한 상태였다. 2018학년도 종업식날의 실수들로 자책한 나머지 먹고 자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종업식날의 실수는 일반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다른 교사들의 실수가 국도에서의 단순 추돌사고라면 내가 종업식날 실수한 정도는 안개 낀 서해대교에서의 30중 추돌사고랄까……. 나는 4~5년간의 노력이 모두 허사로 돌아간 듯했고 동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했다. 아무리 재미있는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강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쟨 왜 저러지?' 하는 동료들의 생각이 느껴졌다. 나는 내가 adhd라는 사실이 드러날까 불안해했다. 이쯤에서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다. 실수를 크게 했어도 타인에게 공개하지 않은 이상 동료들이 내가 ADHD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나는 2018년 11월경에 3반 교사가 내가 ADHD임을 눈치챘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길지만 그렇게 생각하게 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나는 adhd를 혐오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adhd임이 드러난 채로 학교생활을 할 자신이 없었다. 초등교사들은 최고로 진상인 학생들을 ADHD라고 의심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교대생 때부터 지금까지 동료들의 한풀이 속에서 ADHD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가득 실린 말들을 꾸준히 들어왔다. 주변 사람들은 내 불안과 정체성의 혼란을 이해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내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까 걱정이 됐는지 내 이야기를 듣기 힘들어했다. 가족들은 사회적으로 기대받는 역할수행을 나만큼 어려워하지는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나는 사회에서 낙오된다면 가족들 속에서도 소외될 것 같았다. 어느 날엔가는 불안한 심리를 회피하고 자기 계발 계획을 짠 적이 있었다. 그러자 가족들은 기뻐했다. 혼자서 방안에서 끝없는 계획을 짜는데 가족들의 안심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지구의 라디오 신호를 우주선 안에서 듣는 듯 멀게 느껴졌다. 나는 스푸트니크호에 실려 우주에서 홀로 질식사한 강아지 라이카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나는 가족들 사이에서 감정을 억눌렀다. 그런 내 모습은 AI처럼 어색했다. 남자친구에게는 AI 노릇을 관두고 불안을 토로해보기도 했으나 남자친구도 내게 평안을 주지 못했다. 그 시기 병원에 방문하여 의사에게 말했었다. 내가 adhd라고 교직 사회에 알려진 것 같다고. 의사는 깜짝 놀라며 나를 살피더니 아빌리파이를 처방했다. 의사가 내게 망상이 생겼나 의심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의사에게 정황적 추론 이외에 확실한 증거를 제시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환자를 종일 상대하는 의사는 내가 정신증 단계로 넘어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겠다. 불안이 심해서 아빌리파이를 처방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의사가 나를 신뢰하지 않고 DSM-5 진단기준을 만족시키는 환자로만 여기는 것으로 느껴졌다. 나는 완전히 세상에서 버림받고 이해받지 못한 기분으로 각종 약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피 말리던 방학 도중 출근했을 때 나는 반쯤 비인간화되어 학교에 갔다. 그때 기억에 남는 점은 교무 선생님의 혐오와 냉소적 반응이다. 오해일 수도 있지만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경멸의 표정으로 나를 슬그머니 바라보던 그의 모습이 생생하다. 그를 원망하는 건 아니다. 그가 합당한 요청을 했을 때 내가 날카롭게 굴었던 적도 있고, 그는 수동-공격적인 모습이 다분했던 나와 대화를 시도했지만 무산된 적도 많았다. 그는 나에게 이래저래 감정이 쌓였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알 것 같다고 해서 내 심리적 타격이 상쇄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출근할 시기가 다가왔다. 아빠에게 나는 학교로 돌아갈 자신이 없다고 말했다. 아빠는 학교에 다닐만한지 테스트 겸 1년만 가보자고, 어려움 속에서도 학교로 돌아가려는 내가 기특하다고 말했다. 아빠의 그 말이 진심에서가 아니라 다른 의도가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면 내가 너무 꼬인 탓일까. 2월 중순에 교장의 퇴임식 및 전출 교직원 송별회가 있었다. 나는 단정하게 차려입고 그 모임에 참석했다. 주차장에서 마주친 선배 교사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녀는 연민과 놀라움이 가득한 시선으로 나를 봤다. 시혜적인 입장에서의 연민은 아니었던 걸로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뒤로하고 송별회 장소에 도착했다. 나는 최대한 의연한 자세로 있으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은 내 눈치를 살피면서도 다가오지는 않았다. 한 선배 교사는 자신의 딸에게 “토순이!”라고 부르는 나를 보면서 어떤 감정을 삼키는 표정을 지었다. 교장은 퇴임 기념 연설에서 자신의 경력을 되돌아보면서, 교직의 꽃은 관리자(교감, 교장)라면서 여러분 삶에서 어떤 어려움과 장애가 있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도전하라고 말했다. 교장의 연설이 끝나고 술자리가 시작되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같이 살던 내게 평소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찾아와서 술잔을 맞대었다. 나는 당황하여 술잔에 채웠던 물을 여러 번 엎질렀다. 그리고 교무 선생님도 나와 이야기를 했다. 그는 나의 고충과 어려움을 이해한다는 식으로 말을 했었던 것 같고 나는 그에게 좀 더 공손한 태도를 보인 것 같다. 내가 소통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왔던 교직원들도 내가 사람들과 화합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람들을 싫어하는 것 같다며 정을 보이라고 했던 2018년 3학년 부장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2019년 첫 모임이 끝났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이 나와 같이 일하면서 느끼는 불편함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메틸페니데이트를 줄인 영향 탓인지, 사람들을 너무 신경 써서 위축된 탓인지 평소보다 실수를 더 많이 했던 것 같다. 교장과 교무는 다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긴 했는데 내가 너무 기초적인 실수를 남발한 탓이었는지 그들은 수런거리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날 그들과 점심을 먹지 않고 혼자 먹었었는데, 교무행정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나한테 왜 같이 점심을 먹지 않느냐고 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 혼란스러운 겨울방학이 끝나고 2019년도 새 학년이 시작되었다. 2019년은 ADHD약을 먹은 지 5년째였으며 두 번째 학교에서의 마지막 해였다. 그해는 평온했다. 학사 운영이 복잡하지 않았고 교육과정에도 익숙해져 있었고 우리 반 학생들도 순했다. 그리고 그해 동료 교사들도 나에게 배려를 했다. 직장에서 여유로웠기에 내 삶에 대해서 탐색할 에너지가 생겼다. 늦봄에 오빠가 결혼했다. 오빠의 결혼식장에서 나는 외로움을 느꼈다. 나도 남들처럼 결혼해서 표준적인 삶을 꾸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와 새언니가 버진로드를 행진하는 걸 보면서, 결혼에는 관심이 생겼으나 몇 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와는 결혼하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을 깨달았다. 그 후 나는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내가 욕심을 부린 면도 있고, 남자친구에게 실망을 한 부분도 있고, 둘이 결혼한다면 맞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헤어지면서 내 몸의 일부가 사라지는 것처럼 상실감을 느꼈다. 그는 나를 이해하기 어려워했고 내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지만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위해 여러 사람을 만났다. 나는 결혼적령기 남자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인 것처럼 연기했다. 그 과정은 상호 면접 같기도 했고 정육점 판매대에 자신을 1등급 생고기로 전시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가 어떤 욕망과 결핍이 있는지는 덮어두고 자신을 사회적 기준에 걸맞도록 꾸미는 행위는 정신적으로 나를 많이 소모하게 했다. 나는 전에 사귀던 남자친구보다 조건이 좋은 그들에게 어떤 끌림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독서 모임에도 열정을 쏟았다. 2018년 친해진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녀는 이해심이 많아서 다소 엉뚱한 내 모습에도 따뜻한 자세를 취했다. 그녀는 나보다 훨씬 사회에서 요구받는 이상적인 교사의 모습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녀와 나는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점, 독서와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점, 사회에서 쉽게 지치는 점이 공감대를 형성해서 친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독서 모임에 나도 합류했다. 그 모임은 나를 포함하여 네 명의 교사로 이루어졌는데, 구성원들의 사고방식이 그나마 나와 맞는 편이어서 비교적 자유롭게 떠들 수 있었다. 인근 지역의 다른 독서 모임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할 수 있어 좋았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다. 사회적 기준에 맞추려 자기 검열한 몇 년을 거치면서 나는 소수자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독서 모임에서 퀴어 소설을 소개했다. 전통적인 여성인 척 꾸미고 다녔던 내 겉모습과 매치가 안 되어 그랬는지 의외라는 반응도 있었고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성 소수자와 젠더 문제에 대해 편견을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그 이후로 나는 어디에서건 '안전한 주제'로만 이야기했다. 그래도 독서 모임에는 계속 나갔던 것은 나 자신을 탐색하고 싶었던 열망이 컸던 탓이리라. 아빠는 답답해했다. 선을 보러 다녀야지 왜 독서 모임을 다니냐고, 나이가 들수록 네 가치는 감가 상각된다는 아빠의 말에 저항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유롭지 못했다. 달팽이 같은 사람들이 결혼을 안 해서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떨어진다는 새로 온 교장의 말도 한 귀로 흘리지 못했다. 나는 나를 거짓으로 꾸미며 결혼을 위한 활동을 지속했다. 자존감은 점점 낮아졌다. 아무리 참하게 꾸미고 현모양처로 연기해봐도 내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거짓으로 연기할수록 괴로웠다. 결혼 생활을 위해 매 순간 자기 검열하며 살아간다면 불행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자신으로 살면 알맞은 자리를 찾아 들어가지 못해 가족을 실망하게 만들고 결국엔 외로워질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세상의 기준에 맞추려고 하는 자기 검열은 내 속에서 조용하지만 집요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자기 검열이 곯아서 시커멓게 썩기 시작하던 그해 말, 나는 몇 년간 원만하게 지내던 같은 학년 교사의 사소한 말에 엄청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 후 같은 학년 교사들은 나에게 냉랭했으나 학년 부장의 중재가 있었던 듯 태도가 온건하게 바뀌었다.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 동학년 교사들과 만나는 마지막 자리가 있었다. 그들과 몇 년 만에 만난 듯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이질감이나 적대감보다는 깨지기 쉬운 무엇인가를 다루는 듯한 섬세함을 느꼈다. 사람들에게서 감정의 극단을 겪은 뒤 얻게 되는 너그러움이나 통찰이 엿보였다. 동학년 교사들은 평소에 주고받던 소문이나 뒷담화도 줄인 채 조심스레 말했다. 나와 직접 갈등한 교사가 낮은 목소리로 내 안부를 물었다.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고 배려해주는 동학년 교사들의 태도에는 서먹하지만 애틋함이 있었다. 짧은 모임을 마무리하고 모두 흩어졌다. 먼발치에서 5년 동안 같은 학년을 맡았던 선배 교사가 보였다. 그는 나에게 도움도 주고 말도 종종 붙였었다. 그러나 그는 내가 듣기 싫은 말을 여러 번 했었다. “술을 먹지 않으면 사람들이 무시한다. 술이 정신 치료 약이다.” “남자들은 시각적인 동물이다. 그러니 많이 먹지 말아라.” “아무 말이라도 해봐라. 네가 하는 말은 외계어 같다.” “결혼해라.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면 교사로서 성숙해지고 아이들의 삶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그는 내가 불편함을 표시할 때마다 이해하기 힘든 표정으로 섭섭해했다. 그러던 그가 집에 가지 않고 한동안 나를 바라보았던 시선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렇게 두 번째 학교에서의 마지막 모임이 끝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