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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가 꼬물꼬물
Level 4   조회수 140
2020-04-22 22:47:13

 #1 


물생활 2년 만에 물고기의 표정에서 긍정과 부정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육지동물인 내가 어류 나름의 델리커시를 이해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작은 물고기의 감정이라도 읽어내려고 보다 보니 적어도 심통이 났을 때의 원인을 짚어낼 수 있게 되었다. 


온도, 어항의 비침, 잎사귀 틈을 파고들면서 놀다가 얼굴을 박음. 어항에 새로운 요소가 없어서 지루함. 인간이 자꾸 쳐다봐서 신경쓰임 등. 


아 오늘은 유난히 신났다 싶었는데 어항 한 켠에 거품집을 지어 놓았더라. 환수한다고 스포이드로 없애는 꼴을 멀찍이서 보더니 오후 두 시간 정도 느릿느릿하게 움직였다. 우울이었을까?


이번 베타의 어령은 아직 몸의 무늬가 다 발현되지 않은 3개월령. 조금 오래 산다 쳐서 수명을 3년으로 잡으면 사람으로 열 살 남짓이다. 사람으로도 물고기로도 한창 크는 시기라 색이 아침저녁으로 변하고 있다. 갓 왔을 땐 투명에 가까운 셀로판이었는데 꼬리지느러미에 거뭇한 기운 등지느러미에 붉은 기운 배지느러미 핀과 꼬리지느러미 핀에 파란 기운이 어리나 싶더니 유색이 점점 번져 이제 몸의 반은 검고 붉게 되었다. 몸도 이 주 만에 2배에 가깝게 커졌고, 걸핏하면 놀라는 바람에 어항 삼면을 막아두었던 에이포도 이제는 딱히 필요가 없는 듯, 손을 넣으면 밥 내놓으라고 쫓아다니신다. 


#2 


어항을 볼 때 꼭 인지하고 있어야 하는 점이 있다. 나 자신 역시 어항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라는 사실이다. 온도도, 수질도 조명의 방향이나 기타 다른 요소들도 문제가 없는데 물고기가 어항 벽에 몸을 비비는 것은 내 안경에 자기 모습이 비쳐서일 수도 있고, 내 모습 자체가(아무리 평소에 손을 쫓아다닌다고 해도) 물고기에게 위협이 되어서일 수도 있다. 또, 새벽에 페니드를 먹고 열공한 오후 세 시쯤 늘 물고기가 화난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 시간대의 내가 우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샤워를 하고 밥을 먹고 오후에 다시 보면 물고기는 별 문제가 없다.


 말 못하는 물고기의 감정을 읽어내려면 관찰 당시의 내 감정도 돌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구분이 수월하다. 


어항에 뭔가를 넣을 때도 내가 그것을 사 넣고 싶은 것과 물고기가 실제로 기분좋은 행동을 보이는 것을 구분해야 하고, 환수를 해야겠다는 느낌이 들 때도 당장 시험을 앞둔 내 불안과 초조가 반영된 생각인지를 되돌아봐야 한다. 생각과 실재를 구분하는 것은 늘 어렵다. 늘 그 중간 지점에서 멍하니 물고기를 관찰한다. 예쁘다는 미적 판단만은 꼭 그 지점에서 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참 물고기가 내 눈에 함함하다. 감사하게도 마음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작은 생명을 돌보다 보니 스멀스멀 올라오던 공황 기운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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