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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 5분 일찍 병원에 가는 길
Level 4   조회수 212
2020-11-12 13:28:36

#1.

나는 항상 '뭘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걸 싫어했다. 행동하는 그 사람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만족 외의 좋은 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계속 그렇게 이유를 찾아서 후퇴하면 맨 처음은 의미없는 탄생이고 맨 끝은 죽음이니까, 모든 행위들을 미래를 위한 초석으로 쌓아둔 끝이 피할 수 없는 무너짐이니까 그냥 지금 내 기분, 지금 내가 내키는 대로 살려고 했다. 그렇다기엔 마이너스통장 하나 손 떨려서 못 뚫는 사람이고 거기에도 온전히 기반해서 살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어쨌든 목적론은 의식적으로 싫어하고 있었다.


#2.

여친님은 반대다. 매순간 계획이 있고, 계획을 채워넣지 않는 행위, 별도의 목적 없이 유튜브를 보는 것따위를 정말 싫어하신다. 나는 짧은 기간이지만 이 사람을 집중적으로 관찰하면서, 내가 사소하게 치부했던 것들에 신경쓰는 연습을 했다. 손톱을 제때 깎고 가는 것부터 얼굴을 제대로 씻고 피부관리를 하는 것, 남들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머리에 파마를 해 보고, 그 끝에 (주로 남들에게 보이는 인상을 위해) 성형수술을 하는 것까지. 이제 내 구글 캘린더는 시간표로 가득하고, 나는 이것들을 지키는 걸 나를 돌보는 행동으로 여기기 시작했으며, 어떻게 효율적으로 하루를 움직일지를 고민하면서 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니까, 이전의 내가 하던 생각대로라면 결국 잠들기 위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하루의 매 순간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루의 계획을 지킨다는 아무것도 아닌 목적을 위해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게 아무렇지도 않은데, 그 이유는 이전의 내가 즉흥적인 행동을 고수했던 것과 같다. 어차피 삶에는 본질적인 의미가 없고, 내가 이게 좋으니까. 즐거우니까. 삶의 그 무의미한 사소함 위에 내가 이게 좋다는 감정이 쌓이니까.


#3.


왜 사느냐는 질문은 철학자가 했을 때 순진하고 쓸 데가 없다. 하루를 충실한 노동으로 보내는 노동자에게나 그 질문은 어울린다. 의복이 무의미하다면서 굳이 벗고 사는 도가 사상가들이야말로 입고 벗음에 가장 신경쓰는 사람들이다.


#4.


생각해보면 나는 옷을 잘 입었다고, 자기가 똑똑하거나 돈이 많거나 권력이 있다고 나를 괴롭히던 애들이 싫었다. 걔들이 누리는 문화의 의미를 거부하고 싶었고, 그들처럼 입고 행동하면 남들이 보는 눈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바뀔 거라는 사실도 싫었다. 그렇게 입지 않았을 때, 더럽고 추레할 때 나를 그대로 봐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그러다가 남들은 신경도 안 쓰는데, 무의미하다, 무의미하다, 계속 되뇌면서 의미에 집착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제 누구도 날 괴롭히지 않고, 내가 바라던 대로 나를 그대로 봐 주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말하는 '옷 좀 챙겨 입으라', '계획적으로 살아 봐라'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맥락을 띠는데도.


#5.


우리는 서로를 서로를 향해 당기면서 중심으로 가까워지고 있다. 나는 지하철 시간을 그냥 버리기 싫어서 에이앱 글을 쓰고, 그분은 다소의 무계획을 감내하며 목표를 다 달성하지 못한 날을 괜찮다고 말하고 계신다.


중간에서 만났을 때 서로가 각자를 마음에 들어할 수 있길. 일단 나는 이런 내가 생소하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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