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posts

명예의전당



글보기
약을 먹기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나일뿐인데.
Level 2   조회수 154
2021-03-24 19:58:50

 

약을 1년 넘게 꾸준히 먹고 있다.

예전에 우울증으로 의심했던 과잉충동이 줄었다. 수면제와 항우울제를 끊었다.

 

간혹 머릿속에서 생각이 많아지다 못해 불꽃놀이가 일어나듯 팡팡 온갖 상념들이 튀어나가서 허우적대던 일들이 사라졌다.

 

그런데 행동 집중력에 대한 문제는 잘 모르겠다.

여전히 난 일을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룬다. 주말에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서 집에서 잠만 잔다. 일 하다가도 딴 짓이 하고 싶고, 재미없는 비문학 책보다는 가벼운 웹소설 읽는데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건 집중의 문제라기보다는 내 욕구의 우선순위 문제같다.

 

내가 집중이 안되서 안절부절 못하는게 아니라,

'나는 지금 당장 이걸 하고 싶어!'라는 일차원적인 욕구의 문제랄까.

 

물론 상황에 따라서 내가 하고 싶은 행동 욕구를 누르는게 중요하겠지.

업무시간에는 해야할 일들을 해야한다거나...

그런데 나는 지금 당장 노트에 내 감정, 내가 생각하고 있는걸 끄적이고 싶은걸.

 

(아마 담당선생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상황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어요!' 라고 얘기하실 것 같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정말 일을 하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들을 뇌 저편으로 던져놓고 마무리 짓는게 가능한걸까? 나는 도무지 그 욕구를 못 참겠던데. 해소되지 않을때까지 머릿속에서 맴돌아서 패닉상태가 되버린다.
적어놓고 생각해보니 이게 심해지면 충동장애겠구나...
세상에나, 나는 여태 불쑥불쑥 찾아오는 욕구와 생각에 잠식되어 있었는데 이런게 없는 사람들이 있다니. 오히려 그게 더 신기하네.




-


약을 먹고 분명 좋아졌지만 한편으로는 약을 먹지않고 살아왔던 시간동안 그냥 익숙해져버린 패배감(난 이걸 시작해봤자 또 작심삼일로 끝나겠지)과 무절제한 삶은 약으로는 부족하다.

-


약먹고 인생 활력 최대치를 한번 찍고 난 후로 극심한 번아웃에 시달리며 넋을 반 놓고 살았다. 여가도, 생각도 없고. 그저 출퇴근만 하고 집에선 한 마리의 겨울곰이 되었다.

이제 다시 열심히 살아볼까, 하고 데일리루틴으로 독서, 운동, 다이어리 쓰기 등등을 체크하고 있다. 목표는 10페이지 이상, 10분 이상, 100글자 이상, 매일매일. 최소치로 목표를 설정하고 스스로에게 부담감이나 압박감을 주지 않으려했다. 거창한 목표는 제대로 실현된 적이 없으니까.


벌써 3주차다. 체크리스트 채우는 재미도 있고 동기부여도 되서 나는 만족했다. 좋아지고 있어! 이렇게 조금씩 늘리자! 
그런데 지적받았다.
1년이 지났는데도 나를 1년 전의 나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약을 먹으며 좋아졌으니까 과거의 나와 다를텐데도 실패를 경계해서 목표치를 너무 최소로 잡고 있다는 것. 좀 더 적극적으로 목표를 크게 설정해도 된다고.
머리로 이해는 했다.
그런데 우울해졌다. 약 먹었다고 내가 갑자기 쓰레기같았던 근성이 개과천선한 것도 아닌데. 심지어 한달전만 해도 무기력하게 집에만 가면 인간쓰레기가 되었는데. 이런 내가 또 약을 일년째 먹었으니까, 라는 이유로 더 잘해야한다고...? 

기대만 받으면 반발심리에 다 때려치고 싶은 사춘기가 온 것 같다. 왜 굳이 남들보다 잘해야하고, 더 큰 목표를 설정해서 도달해야하고, 향상심을 가져야하지. 나 그냥 소박하고 소확행으로 기쁘게 살면 안되는걸까... 
약을 먹기전에도 그만큼 했으니까~
아니 그만큼 하기위해서 내가 얼마나 정신이 갈렸는데요...

이제 약도 먹으니까 예전보다 덜피곤하게 그만큼만 하고 살면 안되나요.

오늘은 그저 잘하고 있다고 위로와 격려를 받고 싶었는데.
1년 약먹었다고, 여태 살아왔던 내가 사라진건 아니잖아요.
머리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이해하는데
그냥 기분이 우울하다. 이전의 내가 불쌍해서, 여전히 과거와 습관에 젖어서 한발자국 걸을 수 있는걸 반의반도 못 디디고 있다는게 슬퍼서. 

 

댓글
자동등록방지
(자동등록방지 숫자를 입력해 주세요)
이전제목없음 Level 32021-03-25
다음약추가 Level 32021-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