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릴 적의 기억들은 놀라울 정도로 남아있지 않다.
열심히 집중하고 더듬어 보면 뜨문뜨문 끊어진 기억들이 보인다.
우당탕탕 뛰어나니며 혼났던 나, 엉뚱한 모습들로 집중을 받았던 나,
꽤나 귀여움을 받았지만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나...
2.
초중고 생활기록부를 떼어봤다. 나의 과거인데 새로운 책을 읽는 느낌이었다.
'내가 이랬다고?' 놀라울 정도로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내 모습들이다. 낯설었다.
이게 나였구나. 산만하고, 주의를 들어도 개의치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모습들,
어느 학년은 밝았지만 어느 학년은 어둡고 소심했고, 말썽꾸러기였다가 모범적이었다가,
성적이 바닥을 기다가 전교 1등을 하다가, 제멋대로다.
3.
주변에서 우스갯소리로 나에게 ADHD라고 했다.
나도 장난으로 받아들여서, 나도 그걸 장난의 소재로 삼곤 했다.
나는 ADHD가 아니니까.
4.
인생의 여러 경험을 하고 20대의 끝자락에 방황이 찾아온다. 그리고서 스스로 한계를 느낀다.
결국은 나의 노력이 부족했음에도, 죽을만큼 노력해볼 생각은 안 하고 어디선가 또 원인을 찾아댄다.
'나 진짜 ADHD인가? 그래서 이렇게 못하는 건가?' 비겁한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5.
코너에 몰렸다. 삶을 살아오며 '진짜' 노력하지 않았고, 이제는 '진짜' 노력해보고 싶은데, 그게 되질 않는다.
노력을 했음에도 실패할 것이 두려워 노력을 시도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정말로 노력이 되지 않음을 자각한다.
엄청난 자괴감과 압박감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6.
친구의 추천으로 정신과에 처음 가본다. 검사에 큰 돈을 아까워하지 않고 지불했다.
내심 결과에 기대를 한다. 나는 그래도 똑똑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이런 결여된 모습들이,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것처럼 나의 성격이고 매력이었으면 좋겠다.
7.
결과를 보고 믿지 않았다. 부정하고, 약을 처방받지 않고 병원을 나왔다.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남들도 나같지 않나?' 였다.
그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아 부서졌고, 몇 달 동안 현실부정 하다가 다시 병원으로 기어들어갔다.
8.
약을 처음 먹었다. 처음 먹은 날 눈물이 나왔다.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이 나이 먹도록 나를 관심 있게 바라봐 준 사람이 없었으며, 권유해준 사람이 없었으며,
나는 선천적으로 열등한 사람이며, 세상과 어울리지 못한 것에 대한 슬픔과,
나의 실패에 대한 좋은 핑곗거리가 생겼다는 것에 한편으로 안도하는 내 모습에 대한 경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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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내키면 이어서 쓰기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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