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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ADHD. -①
Level 3   조회수 497
2021-12-07 11:02:18

나는 어릴 때부터 차분하고 생각 깊고 어른스럽다라는 평을 많이 듣는 사람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ADHD는 TV에서처럼 짜증내고 소리지르고, 물건을 던지며 분노를 참지 못하는 아동들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ADHD는 한 가지 모습의 증상으로만 생각했다. 

결코 내가 ADHD라는 것을 의심해보며 산 적이 없었다. 


올해 여름은 내게 특별하면서도 특이하고, 더운 날씨인데 땀보다 눈물을 더 많이 흘렸던 계절이었다. 

직장 생활 중 느낀 우울 극복을 위해 찾았던 심리상담센터를 약 3년 만에 종결 했던 여름이었다.


1년 차 상담을 진행하던 중, 우연히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ADHD의 증상들에 대해 적혀진 글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이 증상들이 나와 겹치는 것이 많아보였다. 다는 아니지만 10개중에 7~8개 정도?   

그 후로 자꾸 마음 한 켠에는 "혹시 내가 ADHD는 아닐까?" 하는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상담을 진행하면서도 이 부분에 대해 물었을 때 상담사 선생님은 절대 그럴리 없다고 했다. 

나는 꼬박꼬박 모든 회기를 열심히 참여했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상담 시간만은 철저하게 준수했으며

절대 상담 시간에 지각한 적이 없었다. 

아마 나의 이런 모습들이 상담을 하신 선생님조차 헷갈리게 했을 거라 생각한다. 


그만큼 내게 상담은 유일한 희망이자 동아줄이었다. 이것마저 놓아버리면 나는 정말 인생도 놓아버릴 것 같았다.


어린 시절, 학생일 때는 착하고 한 눈도 안 팔고 노력하는데도 성적이 잘 안 나오는 애.

말도 잘하고 책도 많이 읽는데 수학 과학은 정말 못하는 애.

그래서 학창 시절 내내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칭찬과 기대도 받지 못했던 시간들.


재수 끝에 원하는 학과를 갔지만 지방에 있었다.

그래도 좋아하는 분야의 전공이라 열심히 책을 보고 고3때 보다도 더 많이 공부하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학점이 4.0을 넘겨도 그 곳에서 과탑, 단과대탑을 못했다고 계속해서 엄마에게 혼나는 나.


졸업하고 회사에서의 나의 모습은 일만큼은 철저하고 꼼꼼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빠트리는 것 없게 하기 위해 메모를 하고 항상 이중 삼중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큰 직급으로 승진할 수 없었다. 

성과를 내고 인정을 받았지만 윗 직급의 시기와 질투, 압박을 이겨내지 못해 항상 갈등을 빚고 퇴사했다.

기질적으로도 예민하고, 불안과 강박이 왔다갔다 하는 와중에 일마저 못하면 혼날까봐, 존재가치가 사라질까봐 아득바득 발악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실수가 나오면 자책, 자괴감 때문에 우울해 했다.

그리고 남들보다 더 애를 쓰며 사는데, 손에 쥐여진 성과는 너무나도 미미하게 느껴졌다. 

남들과의 비교를 안 하려고 해도 안 할수가 없었다. 비교하는 내 자신의 모습조차 미워했다.


자존감이 낮으니 속에선 자신감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항상 끝나지 않았다.


강박과 흑백논리도 심했다.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실망감이 자책감으로 바뀌고 바로 우울도로 직결되었다.

나는 착하고 노력하는 선한 사람이고, 나를 힘들게 하는 타인들은 악이라고 생각했다. 


상담 선생님은 이 부분에서 잘못된 신념과 생각의 변화를 위해 함께 노력해주셨다.

나의 생각과 행동 패턴을 성찰하고 부정적인 신념들을 통찰한 과정은 

그래도 내가 지금 삶을 살아가는데 가끔 든든한 무기가 되어주고 있다. 

절대 헛되지 않은 3년이었다.


그러나 자꾸 본질적인 무언가를 놓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이 생각이 너무 힘들어서 태어나길 후회했었다.

생각이 너무 많아서 관련된 책도 읽고 강의 영상도 찾아봤다. 하지만 이거다 하는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에게 맥주 한 잔 마시면서 푸념했다. "생각이 터질 것 같을 때 머리를 바꿔 낄 수 있으면 좋겠다. 아무 생각 없는 뇌로."

그러면 웃으면서 '맞아 너무 웃겨, 나도 그럴 때 있어!' 하는 한 마디를 듣고 

'그래,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하고 안도의 한 모금 삼키는걸로 위안받았다. 그렇게 ADHD에 대한 것은 잊고 살았다.


그리고 상담을 종결하고 잊고 있던 ADHD에 대해 스크랩 해둔 글을 읽게 되었다. 

처음 읽었던 때와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내 얘기 같은데..."

그러다 갑자기 없던 용기가 솟았다.

3년 전, 정신의학과는 너무 무서워서 상담센터로 갔던건데, 의사의 객관적인 진단을 듣고 싶어졌다.


"돈과 시간과 용기가 있을 때, 가보자.

가서 아니라고 하시면 이제 깨끗하게 잊자. 

그런데 이것도 아니라고 하면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하지?

그래, 아니라고 하면 이렇게 사는 거 너무 힘들어서 다 그만둬야겠다." 


까지 생각이 들 정도로 겉으론 용기를 냈지만 마음 속은 어두웠었다. 


딱 그 시기에 내가 팔로우 하고 있는 인스타툰 작가가 본인이 ADHD 검사를 받은 과정을 만화로 그려 올렸다. 

우연일까? 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누군가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다는 것에 더 용기를 얻게 되었다.

어떻게 움직여도 나침반의 바늘이 모두 한 곳을 가리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작가님께 물어 에이앱이라는 사이트를 알 수 있었다.

덕분에 헤매지 않고 어떤 병원을 갈지 정보를 찾았다. 전화로 일일이 확인해보기 막막했는데 에이앱 덕분에 병원을 찾을 수 있었다.


2시간 가까이 진행된 뇌파, CAT, 각종 척도검사를 마친 후 의사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결과를 보고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검사하느라 많이 힘드셨을 것 같아요. ㅇㅇㅇ님은 결과를 보니 ADHD이신데 좀 심각한 뇌파 상태고...~@#$%%"


왈칵 나오는 눈물 때문에 뒷 말씀이 잘 들리지 않았다.  

지난 30여년 간의 세월이 정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검사 결과를 들으며 울다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정말 제 잘못만이 아닌건가요...?"


그렇다고 하셨다. 더 일찍 병원을 찾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셨다.

뇌의 문제이지, 나라는 사람 자체가 모든 문제를 만든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ADHD도 종류가 있다고 하셨다. 주의력결핍형, 과잉행동 충동형, 혼합형.

나는 주의력결핍의 조용한 ADHD에 해당된다고 하셨다.


처음이었다.

병에 대한 진단을 받았는데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던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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