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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뜬 해
Level 2   조회수 110
2022-03-16 19: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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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가 있는 날엔 5km씩은 달리고 아침엔 요가나 스트레칭을 하려고한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이틀

두째날엔 페이스가 좀 올랐다
뭐했다구 근육통이람?

한강은 역시나 역시다.
너무나 사랑스럽다.
한강뷰 아파트 그딴 거 못가져서 그런거 아니구 난 다 필요없구 그냥 어디 저으기 길따라 걷다가 뛰다 한강물을 훑으면서 까만 물내음을 마실수 있음 그걸로 족하다.

월요일 아침 녹초가 되어 퇴근 후 곧바로 차를 몰아 알바 출근을 하다보면 비로소 한강 다리위에서 마주치게 되는 그림이 있다.
눈꺼풀을 짓누르는 무거운 빛과 떠오르는 해가 물 위에 걸려있는 비현실적인 풍경. 

마치 인상파 그림같기도 한 그 그 광경을 보고 있으면 (운전 똑바로 해라) 
어느새 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온갖 잡 생각들이 잔뜩 흔들어 터뜨린 콜라캔처럼 펑 터져 흩어진다. 
그래 이런 장면을 매주 목격할 수 있는 것도 참 감사하다면 감사하지.

바깥 공기에 한숨을 내쉬면 하얀 서리가 뿜어져나오는 꽁꽁 얼어 추운 어느 날은 양평으로 향한다.
그러면 엘사가 스케이트타며 렛잇고를 불러도 될 만큼 시린 한강을 마주할 수 있다. 

그런 날의 한강은 혀끝을 대면 챡 달라붙을것만같은 아린 맛이었다. 하얗고 하얗게

동네에 마늘치킨 맛집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아무쪼록 귀헌 음식이었기에 치킨 한마리를 싸가지고 한강 고수부지로 소풍을 나가기도 했다. 

이제는 다 정비되어 사라져버린 옛 한강 둔치에는 그 때의 들꽃과 추억이 피어있었다.

첫수능 끝나고 망했다며 친구와 맥주를 사들고 우리 그냥 콱 죽자며 한강다리로 향했었다. 

재수 때는 실패하면 한강행이라고 늘 맘에 접어두기도 했다.
다이어트한다고 여의도 한강 공원까지 걸었다. 
그깟 불꽃놀이 보겠다고 꾸역꾸역 밤섬까지 걸어갔다가 무겁게 돌아오곤 했다.
그때도 한강이 내 옆에 있었구나.

지척이 숲이고 뭐고 난 역시 물이 좋았던 역사가 있어서. 수영도 못하는 주제에 

무슨 키즈 수영같은 걸 다녔던 것 같은데 왜 끝까지 못 배웠을까?
지금은 물 위에선 그저 뒤로 누울줄 만 알 뿐이다.

때로는 검은 물 밑으로 사정없이 뛰어내리고 싶다.
어렸을 때 보았던 오싹한 SF소설에선 땅속을 공기처럼 다닐 수 있게 진화한 신인류가 있었다. 

물 속을 공기처럼 자유로이 다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 꼭 멕시코에 가야지. 너무 투명해서 외려 아무 것도 볼수 없는 세노테로 퐁당 가라앉고 말테다.


약을 다시 먹기 시작한 지 사흘
mph의 효과는 역시나 드라마틱했다.
정신차리지 않으면 항상 희뿌옇던 세계에 안개가 걷힌 느낌
애쓰지 않아도 모든것이 잘 보이는 느낌
시야가 탁 트이고 드론으로 하늘 위에서 모든 걸 조망하는 느낌


일하는데 이름 석자가 그렇게 잘 보여서
이름과 숫자와 모양이 기를 쓰고 보려하지 않아도 그냥 뇌 속에 날아와 박히는 수준이라 화가 막 났다.
욕나온다 진짜. 왜 내 전두엽 이따구임?


그래도
그 때 결국 약을 그만둔 이유는 내가 내가 아닌것 같아져서. 나를 기쁘고 우울하게 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지는 듯 해서였다. 

세상에 내가 음식이 그렇게 맛이 없고 식욕이 사라질수가 있다니

먹지 않고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잘 버텨냈다. 지난한 우울의 시간을 지나 이제는 터널 끝에 서 있다.

그런데도 기분 외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나는 여전히 덤벙대고 실수투성이에 시간관념이 없고 

집은 엉망진창에 무엇을 도무지 어찌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혼란한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제는 살 만 하다. 하고 싶은 일들도 많이 있고...

그런 나의 일상이 더이상 밉지 않다.

이 나이에도 어린아이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어쩌면 축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변화할 수 있음을 안다.


진단 받은지 어언 13년이나 지났다.

그때는 adhd 진단이 내 삶의 동앗줄처럼 느껴졌었다.

내 모든 고난과 역경과 불행의 탓이 되어줄 

날 망치러 온 구원자 쯤 되는 그런 존재.


돌이켜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그냥 나 자신을 내가 받아들여주는 것이었다. 노력 부족도 아니고 못나서도 아니고 그저 내가 이렇게 태어났을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내가 나여도 괜찮다는 것.


거기서부터 새로운 마음이 시작된다.

둥실 흘러가는 한강물처럼 자연스럽게.

망치와 끌로 나를 깎고 고치고 종국에가서는 내가 아닌 무엇이 덩그라니 남겨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나로 있기 위해서는 나를 포기해야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결국엔 다시 약을 먹지 않기위해서 약을 먹기 시작한다. 



낮에 뜬 해가 발갛다.
원래는 맨 눈으론 볼 수도 없어야 하는 것인데


그니까 흐려야만 보이는 것도 있다는 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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