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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참 이상한 날이었다.. (시댁의 이삿날)
Level 5   조회수 49
2017-10-06 10:55:55
몇 달 전 다른 카페에 썼던 글인데 재활용 해봅니다ㅋ

이걸 시작으로 약을 먹고 달라진 점을 하나하나 써보려고 해요.

시리즈 이름은 '그날은 참 이상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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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시댁의 이삿날이었다.


이삿짐은 어머님과 시누이가 천천히 싸신다 하셨고 당일 날 나르는 건 이삿짐센터 몫이니 너희들은(나와 남편) 천천히 오거라 하는 말씀에 오전 10시쯤 갔던 것 같다.


그런데 웬걸 미처 싸지 못한 짐이 집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신경 쓸 것도 많으시고 짐은 싸도 싸도 끝없이 나오고 이제 연세도 많으시고ㅠ 해서 손도 대지 못하고 나가떨어지신 거였다.


그때부터 미친 듯이 정리하고 짐 싸는 일을 했다. 그러면서 틈틈이 아저씨들의 짐 나르기를 관리했고 나르는 데 있어 손이 부족한 건 함께 도왔다.


오후가 지나 이삿짐 차들과 함께 가족들이 떠한 뒤 남은 집안정리도 했다. 대형 쓰레기봉투들을 사서 쓰레기를 넣고 분리수거할 것 하고 난장판이 된 집안을 쓸고 닦고 기타 등등..


모두 마무리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종로에서 경기도 양주까지 가 트럭의 짐들을 모두 다시 부렸다. 위치를 정해 집안에 하나하나 넣고 정리하고 청소하기를 대충 마치자 저녁 9시가 넘어 있었다. 점심 먹은 짧은 시간을 빼고 거의 12시간을 논스톱으로 날아다니듯 일했다.


이삿짐센터 직원을 제외하고는 그날 가장 많은 일을 해낸 사람이 나였는데(남자보다 더) 놀랍게도 그 모든 노동을 쉬지 않고 빠릿빠릿하게, 침착하고도 에너제틱하게, 심지어 즐겁고 활기차게 했다! (이 글을 쓴 이유)


평생 처음 겪는 노동의 기쁨이었다. 과장처럼 들리겠지만 일 하는 게 너무 즐겁고 일이 자꾸 튀어나오는 게 도전정신을 자극하기까지 했다. 되도록 많은 일을 하고 싶다, 내가 다 해치우고 말리라! 고 생각했다.


물론 10시쯤 약기운이 떨어지자 피곤이 화르륵 몰려와 돌아오는 길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졸렸다는 게 함정이지만 그전까지는 나 자신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부지런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평생 내가 대단하게 생각하고 존경했던 그 사람들 마냥.


그동안 약의 효능을 주로 정신적 노동 면에서 느껴왔다. 머릿속의 혼돈과 불안초조감을 완화시켜주고 과제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오래도록 엉덩이를 의자에 머무르게 해주는 힘, 예전보다 조리 있게 말하고 행동하게 해주는 힘. 물론 귀차니즘도 많이 경감시켜줬다. 집안정리와 청소 등의 잔노동이 예전보다 덜 귀찮아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본격적인 노동의 하루를 보낸 건  복약 후 처음이었기에 좀 많이 놀랐다. 일평생을 게으른 애, 무기력 그 자체, 불성실한 애 취급을 받고 살았고 거의 늘 특히 몸 쓰는 일에 있어선 어쩔 수 없이 이를 악물고 불굴의 의지를 풀가동하여 근근이 살아온 나였는데 이제 ‘일 잘하는 사람’ 코스프레를 당당히 하게 됐다니.


어릴 때부터 ADHD라는 걸 알고 약을 먹을 수 있었다면, 아니 10년 전에라도 먹기 시작했다면 내 인생은 상당히 많이 달라졌을 텐데란 생각에 그날 내 기분은 좋지만은 않았다. 신기하고 대견하지만 억울하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했다.


간혹 보면 약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으로 복용을 꺼려하거나, 약에 의존하기보다는 멘탈의 힘(인지행동치료 같은)으로 이겨내겠다고 버티시는 분이 계신데 약이 몸에 안맞아 못 먹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해하기가 좀 어렵다. 적지 않은 나이에 내가 ADHD라는 걸 알게 됐지만 을 약 복용 이후로 삶이 엄청나게 바뀌었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하물며 20대, 30대 분들이라면 주저하며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많이 호전되고 약복용으로 새 삶을 찾게 된 분들은 카페 접속을 잘 안 하신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나 역시도 이 질환에 대해 궁금한 건 이제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지만 뭐 혹시라도 도움 드릴 수 있는 게 있을까 하여 들어온다.


우울한 내용이 많아 성인ADHD들은 다들 이렇게 척박한 인생을 살아가나, 이 질환을 갖고 태어난 이상 그럴 수밖에 없는 팔자인가 생각하는 분이 있을까봐 하는 얘긴데 그렇지 않은 사람도 무척 많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좋아지신 분들은 카페를 많이 떠났고 이 카페 회원은 아니지만 성인ADHD로서 전문직에 종사하며 남부럽지 않은 삶을 영위하고 계신 분들도 많기 때문이다


 

 

한줄 요약/걱정 말고 약을 드세요. 한약 말고 양약이요.


사족/이삿날 날아다닐 수 있었던 절반은 메틸페니데이트의 힘이었지만 절반은 평소 꾸준히 했던 운동 덕이었습니다.


의욕은 넘쳐흐르는데 몸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안 되겠지요. 운동을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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