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25 새벽에페니드 조회수 38 2018-03-25 18:37:18 |
#1
철학과에서 수업을 듣다보면 참 똑똑한 사람이 이렇게 많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상의 논리를 이렇게 저렇게 가지고 놀고, 빠져들고, 실망하면 버렸다가, 다른 걸로 갈아타다가, 종국에는 자기 생각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나는 거기에 합류해서 어떻게든 따라가보려다가, 그만두었다. 계기는 군 생활이었다.
#2
남에게 당당히 말할 수 없는 소위 '부끄러운' 군생활을 보낸 나는 이전처럼 당당하게 발표하지 못했다. 이야기를 전개하기도 힘들었다. 친한 친구들이 반 웃음으로 OOO(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어서 하나는 그냥 OOO이고 다른 하나는 포스트 군대 OOO라고 말할 정도로 달랐다. 나는 논쟁을 즐기던 이전의 내가 부끄러웠고, 이제 과정이 되는 논리 대신 결과만 들었다. 가령 플라톤이 이데아를 이야기하면서 '암살술'은 사실 '해부술'이며, 기술이 기술인 한은 사람을 위해서 쓰이는 것이라고 말하면, 나는 중간을 싹둑 자르고 올바름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뭐가 옳은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사람들에게 좋은 길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바라는 건 하나였다. 나란 미숙한 인간이 어떻게 사람들 사이에 쉽게 녹아들어 살아가는 것. 이전같은 괴로움을 받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슬프지 않게 살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생각했다.
#3
그건 사실 내가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던 (판단라기보다)감정이었다. 나는 사실 언제든 그렇게 산만하고 얼빵하고 바보같은 사람이어서, 유치원 때 신발에는 압정이 들어있었고(선생님이 날더러 왜 이걸 여기 넣었냐고 했는데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초등학생 때는 날마다 가위만 눌릴 정도로 계속 괴롭힘만 당했다. 그때 난 참 주변을 많이도 미워했었다. 잠드는 순간만이 행복하면서도 아쉬웠다. 그랬던 것이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상당부분 괜찮아져(1년에 한두번은 내 카스트를 떨어뜨리려는 누군가와 치고받고 싸웠지만) 대학생 때는 아주 기고만장해져 있었던 것이다.
#4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전만큼 밝지는 않아도 대학을 다니면서 꽤나 괜찮아진 나는 졸업 직후 별 생각 없이 반쯤 알바에 가까운 곳에 취업했다가 호되게 당하고 말았다. 대충 서울로 치자면 홍대 지하철에 붙어있는 매장에 주말 하루 매출이 1200만원쯤 나오는 곳이었다. 할인 적용할 건 얼마나 많은지, 그게 또 자동화되어있지 않으면 손으로 일일이 적용해야 하는데 한꺼번에 포스로 적용해야 하는 상품들은 또 따로 있었고... 상품이란 게 또 몇백개는 되다보니 정말...아.
#5
군대 때 끊었던 adhd약을 다시 달고, 불안증 약도 처방받고, 집안 돈을 축내다가 청소부 일(이건 아주 적성에 맞았다.)을 하면서 그래도 이 일은 좀 낫지 않겠냐며 사서교육원에 등록한 게 불과 1년여 전. 그때 나는 참 어지간히도 절박한 심정이었다. 부디 내가 세상에 해 줄 수 있는 일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사회에 녹아들 방법이 있기를 바랬다. 그랬던 내가 지금, 반장 일이 많다고, 사랑이 이루어지질 않는다고 끙끙거리고 있는 것이다 ㅋㅋㅋㅋ 아 정말 바보같다. 바보같아서 그나마 지금까지 사람 좋아하는 성격을 유지하나보다.
#6
사랑이건 일이건, 본래 내가 바랐던 것을 생각하자. 유치원 때, 초등학생 때 나는 뭘 바랬었지? 세상에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기를. 전역 후에는? 제발 내가 누군가에게는 쓸모가 있는 사람이기를. 그렇다면 지금 나는? 평생교육원에는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없고, 누군가에게 쓸모가 있다 못해 대부분의 일이 나를 거친다. 마음에 여유가 있다 못해 누군가를 좋아하기까지 하고 있지 않나.
#7
보답을 바라지 말자. 누군가가 이용할 가치라도 있기를 바라지 않았나. 논리 말고 올바름만 생각하기로 하지 않았나. 누가 뻔하게 나를 이용하거든, 한번 웃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정 살기 힘들거든 다시 떠나면 된다.
#8
사랑도 그렇지 않겠나. 마음이란 게 접어 쓰는 게 아닌 모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