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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2 - 뱁새
Level 3   조회수 40
2018-10-13 01:09:17
저번에 쓴 글을 이어서 쓰려고 했으나 그러면 너무너무 긴 장황한 똥이 나올 것 같아 밤을 홀딱 새야하기떄문에,  요번엔 또 다른 회상의 짤막한 글을 써보았다.(써보니 안짧은 것같지만)

#1 첫 좌절
지금은 누구나 당연하게 컴퓨터를 능숙하게 다루지만 90년대중반~2000년대 초반의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시절만 해도 아니었다. 당시 우리 세대는 살아생전 컴퓨터를 한 번도 만져보지 않은 아날로그세대와 태어나자마자 컴퓨터와 휴대폰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디지털세대 가운데에 끼어 태어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마찰음을 내는 과도기시대였다.

당시에는 Window7도 아닌 Window95가 보편적이었고 지금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플로피 디스크에 소닉과 같은 미니 게임 하나를 용량 가득 채워 겨우 담아 친구 집에서 같이 즐기곤 했다. 당시 최첨단 컴퓨터의 기준은 컴퓨터에 CD-ROM이 달렸냐 안달렸냐, 4배속 CD-ROM이냐 8배속 CD-ROM이었냐 등 지금은 쓸모도 없는 기준이었으며 인터넷이 느려서 영화한편(그것도 불법캠버전)을 다운받으려면 몇날며칠, 길면 몇주일을 기다려야 하기도 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까지 남들보다 발달이 조금 늦었다.(초등학교 1학년까지 내 이름을 직접 발음을 못해서 누가 내 이름을 물어보면 '삐삐'라고 대답했다고 한다....창피...) 그런 내가 유독 컴퓨터에 집~요한 관심을 보여 그 당시에는 무척 빠른 초등학교 2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에 컴퓨터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특히 내가 생각한 것을 모니터에서 즉각즉각 확인할 수 있는 프로그래밍,코딩에 푹 빠졌다.

남들보다 빨리 시작한 만큼, 고학년이 되자 초등학생치곤 꽤나 괜찮은 코딩실력을 지니게 되었고 마침내 중학교 1학년 때는 학교대표로 광역시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학원에는 내 이름 석자가 써있는 플랜카드가 걸렸고,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나를 코딩잘하는 아이라고 치켜세워주었다. 그에 긍정적인 피드백으로 인해 나는 더욱 프로그래밍과 알고리즘공부에 힘을 쏟았다. 난 스스로가 특별한 사람, 프로그래밍관련 재능이 출중한 사람이라 생각했고, 장래희망은 곧 죽어도 프로그래머였다. 이를 증명헤 보이기 위해서 더더욱 악착같이 프로그래밍공부에 매진했다.

광역시대회가 끝나고 그 다음은 전국대회였다. 난 다른 건 몰라도 코딩에는 재능이 있는 아이라고 확신했으며, 부단히 노력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시험이 시작되자 그 자만감은 처참히 무너졌다.

꽤 오래 지난 지금도 그 때의 풍경, 무거운 공기, 당혹감, 질투 등의 복잡한한 감정 등이 잊혀지질 않는다.
Q-BASIC이라는 TOOL을 써서 두 문제를 코딩해야 했고, 시험시간은 4시간이었다.
4시간동안 나는 코딩을 시작할 수 조차 없었다. 정말 문제 자체를 단 1%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제를 읽고, 또 다시 읽어도 어떤 말인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남들도 어렵겠지?하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다들 너무 능숙하게 문제를 풀고 있었고, 심지어 한 문제정도는 벌써 푼 학생도 있었다. 물론 나처럼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으나 소수였다. 한시간 반정도가 지나자 슬슬 포기한 학생들과 문제를 다 푼 학생들이 같이 뒤섞여 시험장을 나가기 시작했다. 세시간이 지나자 대부분의 학생들이 시험장을 빠져나갔으며, 마지막 오류를 찾기위해 고군분투하는 몇몇 학생들과 코딩을 시작하지도 못하고 시험지를 붙잡고 있는 나만이 남았다. 3시간이 다되도록 문제를 읽고 또 읽었다. 마치 기원 수천년전에 쓰인  도저히 알 수 없는 고대문자들을 해석하려 고군분투하는 고고학자처럼.. /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달은 후에서야 이루말할 수 없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지난 4년간 밤늦게까지 공부했던 내 모습들, 주위에서 칭찬해줬던 선생님, 친구들, 가족이 주마등처럼 스쳐갔고 내 자신이 너무 창피했다. 난 결국 빈 모니터인 상태로 시험을 마쳤다. 운동장에서 대기하고 계시던 학원선생님이 나에게 시험을 잘쳤냐고 물어보았을 때, 그제서야 4시간동안 꾹꾹 참았던 울음이 터져나왔다.

중학교 1학년, 내 어린 인생의 첫 크나큰 좌절이었다.

그 일이 있는 후 6개월 후, 나는 컴퓨터학원을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재능이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내가 잘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난 그냥 남들보다 일찍 스타트를 끊어서 남들보다 앞에 있었던 것이지, 내가 절대 달리기가 빨라서 그런건 아니었던 거다. 그저 뛰면서 남들의 환호와 자아도취에 빠져 뒤에서 얼마나 빨리 달려오고있는지를 몰랐을 뿐.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중고등학교 6년동안 내가 프로그래밍이나 알고리즘공부를 할 일은 없었다.(수능관련 빼고)

대학교전공은 어렸을 적 꿈꾸던 컴퓨터공학관련 과를 가진 않고 그저 앞길이 가장 유망할 것 같은 전기전자공학부를 선택했다. 코딩과 완전 무관한 학부는 아니었어서 전공기초 수업중에 코딩관련 수업이 있었다.
국영수과학위주로 공부했던 동기친구들은 아예 코딩 툴을 사용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많이 해맸지만, 나는 아무래도 어렸을 때 다뤄봤던 것들이라 훨씬 수월했다.
동기들이 숙제 프로젝트진행을 어려워할 때 선뜻 나서서 도와주었고, 또 어느샌가 나는 코딩을 잘하는 학생으로 언급되었다. 기초단계를 지나 수업이 학기말을 향해 가자 수업 때 배우는 알고리즘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어려워졌다. 마지막 프로젝트로 상당히 어려웠던 걸로 기억하는데 최단경로+자료구조+재귀를 복잡하게 짬뽕시켜놓은 문제를 교수님이 숙제로 내주셨다. 다른 수업은 제쳐두고 이 프로젝트에 내 모든 시간을 할애했다.

내가 코딩을 좋아해서 그런걸까. 아직 나에게 코딩에 관해 재능이 있다는 걸 어떻게든 다시 한번 증명해보고 싶었던 걸까. 모르겠다.

도서관에서 밤을 새가며 그 숙제에 매달렸다. 생각한 것 만큼 문제가 풀리지 않았고, 결국 나는 노가다성으로 코딩을 무려 1200줄 넘게 짜서 마감시간에 맞춰 가까스로 제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연히 내가 학기 초 숙제를 도와주던 동기가 제출한 숙제코드를 보게 되었는데, 단 300줄정도로 교수님이 내신 문제를 아주아주 감탄사가 나올정도로 깔끔하게 풀어내었다.

내가 거의 일주일동안 메달려서 그것도 겨우겨우 1200줄이나 써가면서 푼 문제를 그 친구는 단 이틀을 투자해서 300줄로 깔끔히 해결해내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느꼈던 쓴 맛이 아릿하게 잠시 느껴졌으나, 그 때처럼 자책하게 되거나 질투가 나진 않았다. 어찌됬든 학점은 나오잖아?(사실 그 학기에 평균학점은 처절했다. 왜냐하면 이 수업뺴고 다른 수업들은 술먹고 동아리방에서 자느라 아예 출석을 잘 하지 않아 D,F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수업하나는 건졌다. 하하)
그 때 통렬히 미리 느꼇던 좌절감이 어찌보면 큰 약이 되었나보다.
만약 그 사건이 없어서 마치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프로그래밍에 재능이 있다고 착각하였으면 어찌됬을까 그 또한 끔찍하다.

그런의미에서 노래 하나 추천드립니다.
제가 애정하는 가수 선우정아님의 곡 , 뱁새
https://www.youtube.com/watch?v=LIT2xMBI1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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