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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1. 04
Level 4   조회수 29
2018-11-04 23:05:11
#1. 너는 선배로부터 카톡을 받았다.

선배는 1년여 전에 공시에 합격해서 고향 시청에서 일하고 있다. 너는 약간 부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선배의 목소리는 별로 좋지 않다.

'붙어도 쉽지 않을걸? K대라고 기대 많이 받을 건데 너 뒷감당 하겠냐?'

비꼼조지만, 신기하게도 악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선배는 네가 adhd라는 것을 알고 있다.

 

#2. 그는 별로 나쁜 선배는 아니다. 너와 마찬가지로 다소 약하긴 해도.

선배는 너를 위로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사회생활에 지쳐 술에 취한 나머지 염세적인 진심을 이야기한다.
이야기가 너의 전공 이야기로 넘어간다. 선배는 네가 애초에 철학과에 간 것이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니가 잘못했네. 나와서 어떻게 먹고 살지 전혀 생각이냐 했냐? 후회 안 해?'

스스로도 신기하지만 하지 않는다. 선배는 일년 뒤에도 그러면 인정해주겠다고 욕하면서 웃었다.

 

#3. 그건 며칠 전의 대화였는데, 불현듯 공부 도중에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교수님 한 분이 술자리 도중에 눈물을 비치신다. 거기에는 너도 있었고, 다른 학생들도 있었고, 그 교수님의 제자인 다른 교수님도 계셨다. 대략 요지는 이러했다.

이 나이가 되도록 공부했는데 아직도 나는 앵무새다.
배운 걸 그대로 말할 뿐이다. 나는 아직도 내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같은 과 선배는 '많이 약해지셨다'고 이야기했지만 너는 꽤 그 장면을 감명깊게 본 모양이다.
따뜻한 화상자국처럼 찍혀서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너는 교수님의 그 강함에 감명받았다.
그건 나이와도 관계없이 온전히 자기 자신인 사람이 보일 수 있는 눈물이었다.

 

#4

약하다. 순진하다. 무슨 꿈속을 사는 사람같다. 세상 사는 일에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너는 그정도로 절실하면 그걸로 된 거라고 생각했었다.

몇 년 전에 봤던 교수님의 눈물에 대해서 생각했을 뿐인데 갑자기 눈물을 참을 수가 없다.

 

#5

좀 더 예전에, 내가 1학년이었을 때 첫 수업 첫 시간에,
그 노교수님은 수업시간에 사랑에 대해서 정의해보자고 하셨다.

너는 딱 한 마디만 기억하고 있다.

사랑이 무엇인지는 내가 아직도 모르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은
'내가 죽더라도 너는 살아라'를 포함한다고.

그런 나이브함. 순수함. 멍청함이 학문의 태도이자 삶의 방식일 수 있다고 그때 생각했었다.
뜻을 세운다는 것은, 나를 지킨다는 것은 적어도 그런 솔직함을 포함한다.
정의할 수 없는 것을 정의하려는 것
살아지지 않는 것을 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것.

 

#6

당혹스러워하면서 너는 오늘 화장실로 도망쳤다.
교수님은 강하셔서 눈물을 보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지만
너는 약해빠졌기 때문에 공부하는 사람들이 한가득한 자습실에서 눈물을 흘릴 수 없다.

 

#7

내 뜻이, 내 뜻이 어디 있었더라...

맞다. 첫 취업자리에서 호되게 당한 후에, 공황이며 불안이며 주렁주렁 되살아났을 때에
위험하게도 술에 취해 거리를 걸어다니다가
너는 플라톤의 『국가政體』를 점자로 볼 수 있는 세상이면 조금 낫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시작한 거였다. 다른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게 본질이었다.

그래서 올라간 평생교육원에서 지금 뭔가 하지 않으면 영영 주저앉고 말 것 같은 기분에
그래서 남들에겐 아무것도 아니지만 반장 일을 시작했었다.
시작하면서 어떻게 바랐던가.

여기서 회복해서, 이중 누구를 좋아라도 해서 애닳은 마음이라도 느껴볼 정도로 괜찮아지면
그것만으로도 참 감사하겠다고.

바라던 대로 전부 이루어지지 않았나.

여러가지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너는 그분이 아파할 때마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이상을 바랐던 건 너의 욕심이지만, 그런 욕심도 그것의 본질적인 부분이지.

#8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었다.
일은 못하지만 멈춰서지도 않았고...
부정적인 피드백에서 비롯된 악의를 편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게 본질이다. 어떻게 사느냐 하는 문제다. 일을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고.

그런 나이브함, 멍청함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로부터 정말 오랜만에 안정감을 느꼈다.
나는 벗어날 수 없는 큰 길의 도중에 있는 것 같다.
그거면 되었다.

너는 괜찮다.

나는 멍청하기 때문에 다시 이걸 잊겠지만
아마도 내 벗어날 수 없는 멍청함이 나를 회복시키겠지.
그래서 후회할 수 없다.
후회 자체가 불가능하게 되어먹었다.



 

 

#PS

분명히 내일 나는 이 글을 지우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하지만 부끄러운 글은 한두 번 쓰는 게 아니라서.
일기장이 차라리 나을 것 같지만 니가 일기를 꾸준히 쓸 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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