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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28

성장이 최선을 다한 증거라면 최선을 다하긴 했나보다. 사고의 패턴, 추론능력이 전과 달라진 것을 느낀다. 그러니까, 고작 일주일 일해놓고 사람이 바뀌길 바랐고, 바뀌긴 했다는 것이다. 더 못 바뀌어서 슬픈 것이다.

내가 강하긴 하다. 정신이 아니라 체력 말이다. 내 강행군은 12월 말일부터 시작되었다. 일을 정말 졸라리 졸라리 잘 하는 친구들과 함께 일을, 저번 아르바이트와 같은 아르바이트를 했다. 찢어질 것 같이 괴로웠다. ADHD 문제를 재인식했다. 군에서 겪었던 문제를 다시 겪었다. 초등학교 때 겪었던 문제를 다시 겪었다. 고등학교 생활, 대학 생활 이후 도망쳤던,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의 적과 다시 만났다. 이름은 아주 심플하다. 어리버리함. 이것은 공부쪽 지능과 무관하다. 공부쪽 지능은 현실을 살아가는 능력과 무관할 수가 있다.

나는 이걸 없애버리자고 생각했다. 긴가민가한 마음으로 약을 먹었다. 이전에 복용했을 때 느끼지 못한 변화가 느껴졌고, 나는 같은 아르바이트에 도전했다. 예전보다는 나았다. 사무실에서 잘한다는 말은 죽어도 못 들었지만 나를 보고 있던 보안팀장에게 입사제의를 받았다. 바로 그 두 시간 뒤에 보안일지를 갈갈이 갈았지만 어쨌든 그것도 내 잘못은 사실 아니다. 다만 유감이라서 보안팀장에게 미안하다고 전화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정말로 최선을 다한 아르바이트에서 마지막을 그렇게 장식해버려서 지난 이틀간 너무 고통스러웠다. 나는 직원들 얼굴이라도 보고 가고 싶어서 구의역에 머물렀지만, 사실 너무 미안해서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선배에게 전화했다.

나를 위로해주며 초밥을 사 준 내 선배, 아르바이트를 소개시켜줬고, 예전에 아르바이트를 같이 했고, 지금은 거기 직원으로 일하는 선배는 사실 뭐 여기가 일 난이도는 거의 없다고, 다만 귀찮을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글쎄, 내가 보기에는 엄청나게 빡세다. 그 ‘귀찮음’은 다양함에서 온다. 다양함은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적이다.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세상의 잡다함, 다양함의 중요도를 선별해서 그떄그때 빠르게 대처하는 것. 내가 못하는 것이 그것이다. 아아 선배가 사 준 초밥은 맛있었다. 나는 선배가 참 좋다. 선배는 내 걱정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해준다. 나에 대해서 모르지만, 넌 그냥 효도(孝道)르가 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해준다. 나는 웃을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 바로 발표가 있었으므로 나는 구의에서 안양으로 향했다. 사람 하나쯤 들어갈 만한 짐을 들고 다니자니 죽을 맛이었고, 세상은 어느새 겪어본 적 없는 툰드라로 나를 굳게 만들었다. 나는 피씨방에서 반쯤 졸면서 마이크로소프트 아이디를 만들고 체험판 파워포인트를 깔고 슬라이드를 만들어 거의 산꼭대기에 있는 학교로 올라가 발표를 했다. 예행연습 따위를 하지는 않았다. 그래, 사무직과 다르게 이쪽 발표는 내 강점이다. 재미있게 잘 했다는 평을 받았다. 나는 갭을 느낀다. 일하는 나와 발표하는 나. 목록을 대조하는 나와 성적을 받는 나. 아시는가. 후자들은 일시적인 상황, 그러니까 발표를 하는 상황이나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쓸모가 있다면 전자들은 일반적인 모두 사무일에 쓸모가 있다. 쓸모가 있는 게 아니라 필수불가결하다.

하루 종일 수업을 듣고 밤 열시쯤 나는 내가 지금 머무는 친구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나는 거의 3초만에 잠들었다.(고 한다.)

나는 지금 카페에 있다. 12월 말경에 발견한 마음에 드는 카페다. 카페에는 내 마음에 드는 구석들이 아주 많다. 적당한 그늘, 적당한 어둠, 나무빛 소재, 노란 조명에 그늘진 콘크리트 구석. 이것들은 나무뿌리로 휘감긴 흙 속 어둠 어딘가를 상기시킨다. 따뜻한 물 속처럼 안락한 이불 같은 흙을 상기시킨다. 나는 조금 눈물이 날 것 같다. 조금 슬프지만 조금 또 아 이것이 나의 삶이라는 자위가 가능한 눈물 말이다. 내일은 병원 진료가 있다.

학교에서 좋아하는 누나와 함께 걸어오는 시간을 놓쳐서 슬프다.(바쁜 일이 있는지 수업 중에 가셨다.)(웃음.)(젊음이 젊음이구나.)

“18.01.28”의 3개의 댓글

  1. Spermata.우주의 씨앗

    미안하다는 감정은 피해자에게 표현할 시기를 잘 노려야 합니다.
    상대가 화가 어느 정도 가라앉아서 침착해지기 시작할 때에 말하는 게 서로 좋습니다.
    감정만 북받쳐오른 상황에선 사과가 오히려 감정을 자극하는 일도 있으니까요.

    다만 그 타이밍을 잰다고 너무 오래 사과를 미루면 그건 상대방에게는 실수를 묻고 넘어가려는 비겁한 행위로 다가갈 수도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사고를 쳤을 때, 수습이 되고나서 약 3시간 안에 사과하는 게 가장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사이에 퇴근한다면 퇴근길에 식사라도 같이 하면서 얘기하는거죠.

    1. 3시간이라는 기준을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소소한 기준이 저에게는 큰 시금석이 됩니다. 안타깝게도 이번 경우는 직원들 일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점, 알바생이라는 위치(책임질 수 없음) 때문에 고민하고 고민하다 시한을 넘겨도 너무 넘겨버렸습니다. 하지만 묻고 넘어갈 생각은 없고, 책임질 수 있는 부분이 없더라도 사과할 수 있는 부분에서 사과를 꼭 하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지금 제 계획은 이렇습니다. 단순하지만, 선배에게 부탁하는 것입니다. 관계된 직원분들(주임3 대리1 부장1) 전원에게 사과하지는 못하더라도, 이중 누구에게 식사라도 하면서 정말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게 단순한 제 마음의 평안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긴 하겠습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정말로, 그분들의 마음이 너무 신경쓰여서 사과를 하지 않고는 버티기가 힘듭니다. ADHD는 저의 기질이지만, ADHD로 인해 발생하는 그 어떤 사태도, 오롯이 ADHD로서의 기질만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부분에서 제가 챙길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조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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